칠갑산을 중심으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 풍부한 느타리 버섯 재배의 최적지로 150여 농가가 1만4천여평의 현대화된 재배사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재배농민들의 높은 기술과 축적된 경험으로 고품질 버섯을 생산 엄격한 선별과 규격포장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있다.
밤나무는 참나무科(Fagaceae)의 밤나무屬(Castanea)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서 수고 10-20m, 직경 1m까지 자라는 양수이다. 밤은 여러 가지 특성 중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형태적 특성과 성분적 특성으로 분류된다. 형태적 특성은 나무줄기가 암갈색이며, 작은 나뭇가지는 암갈색으로 처음에는 회백색의 부드러운 털이 났다가 차차로 사라진다. 꽃은 5, 6월에 담황갈색으로 폈다가 지고, 열매는 9, 10월에 익는다. 밤송이로 덮여 있는 과실이 익으면 과실을 둘러싸고 있는 밤송이가 자연적으로 벌어지는데, 대게 한 송이에 2, 3개의 밤알이 들어 있고, 약 3, 4cm 정도의 크기가 보통이다. 밤은 껍질이 윤이 나고 무거운 것일수록 좋은 것이다.
영양성분 상의 특성은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다 가지고 있는 식품이라는 점이다. 그 중에 탄수화물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칼로리가 높은 음식으로 과식을 하게 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비타민C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겨울철 비타민 공급원으로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철분과 칼슘도 있어, 이상적인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유럽이 원산지인 밤은 현재 여러나라에서 개량종을 개발하여 생산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국밤, 한국밤, 유럽밤, 미국밤의 4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의 밤 개량종을 많이 개발하여 알이 굵고 껍질이 깨끗하며, 윤택이 난다. 모양이 원형, 타원형, 삼각형 등 3가지가 섞여 있다. 육질이 좋고 단단하고 가공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중국밤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고 과실표면에 털이 많아 광택이 없으며 육질은 한국밤에 비해 비교적 단단한 편이다. 속껍질이 잘 벗겨지므로 가공용보다는 군밤용에 적합하다. 재래종이며, 알이 잘고 윤기가 없다. 껍질에는 먼지와 흙이 많이 묻어 있어 구분하기 쉽다.
유럽밤이나 미국밤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알이 작은 편이나 속껍질이 잘 벗겨져서 단단하지 않아 가공용으로는 쓸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중, 남부지방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은 약 10톤 정도 입니다. 원산지로는 청양, 공주, 산청, 하동, 함양 그리고 광양, 등지가 유명합니다. 한국의 깐밤은 대표적인 수출상품으로 주로 미국과 일본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확히 언제부터 밤나무를 심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2000년전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몇알의 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또한 1700년 전인 진나라 때 편찬된 [삼국지]의 마한(馬韓)이란 대목에서는 ‘마한에서 굵기가 배만한 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 다. 그리고 약 1550년전 송나라때의 후한서(後漢書)라는 책에서도 마한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며 길쌈을 하고 큰 밤을 생산하고 있는데 크기가 배만하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당나라 위징(魏徵)의 수서(隨書)나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라는 책에도 백제나라에는 큰 밤이 생산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밤은 한국전역 특히 경기도 이남지역에 자생하여 재배되고 있었다. 한국밤은 이전에 조선밤 또는 조선재래종이라 불렸으며 일본밤의 하나의 변종이라 취급되어져 왔다. 한국밤은 일본산 밤과 비교하여 외관상으로는 떨어지지만 속껍질(내피)가 얇아 탈각이 양호하며, 과육의 색도 황색으로 진하고 밤알도 상당히 커서 은기 정도에 달하며 저장력도 강하다. 그러나 한국밤을 일본에서 재배하면 한국에서 발휘되는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밤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밤나무를 보호해온 것 같다. 한국에서는 쌀없이는 지낼 수 있어도 장작없이는 겨울을 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온돌의 많은 연료가 필요하고, 그 때문에 임목의 남벌이 행해졌다. 그 결과 다른 수종의 큰 나무는 거의 없어진 반면에 밤나무는 아주 좋은 대경목도 남아 있어 이점으로 미루어 보아 옛날부터 밤나무를 귀중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밤은 대추, 잣과 함께 관혼상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한국에는 [栗]자의 지명이 많이 있다 밤을 귀중하게 여긴 증거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경기도의 밤 산지인 시흥군 북면의 일부, 신동면, 과천면, 남면, 서이면의 일대는 고구려시대에 율목군이라 불렀으며 신라시대 경덕왕에 의해 율진군으로 개칭되었고 그후 고려시대에 과주군, 조선시대에 과천군이라 불렀던 것 같다. 어떤 것이든 밤과 깊은 인연이 있는 명칭으로 수백년전부터 밤을 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밤을 산업사로 기재하지는 않았지만, 법전으로서 밤을 보호권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고려시대 睿宗(예종)13년(1118년) 및 明宗18년에 뽕나무, 옻나무, 닥나무, 참나무, 배나무, 대추나무등과 함께 토지의 성질에 따라 식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1485년)에 의하면 관리에게 植栽管理를 시키고 이에 소홀히 한 사람은 처벌하였다. 또한 옻나무, 뽕나무 등과 함께 밤나무를 벌채한 자도 처벌하였다. 이조 22대 영조대왕은 산업을 진흥시킨 왕으로 栗木敬査官에게 밤 산지를 조사시켰던 일도 있다. 그리고 경국대전에 이어 성종23년(1492년)에 속대전이 편찬되었는데, 이를 보면 밤생산 농민들은 국가에 제공하는 부역을 제외시켜 주었는데, 잡역이 면제된 곳들은 경기도 과천, 고양, 강화, 양주, 남양, 부평 등지로서 옛날부터 밤생산지로 유명하였다. 또한 밤나무 목재가 귀중하였으므로 이를 생산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나라에서 밤나무 보호림(栗木封山)을 지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성종 11년(1480)과 1531년) 및 경상도읍지(순조, 1801∼1835)에 따르면 경상남도 창원에 일본밤이 도입되어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림경제]와 [통속산림총서], [임원십육지]에서는 밤이 구황식량 뿐만 아니라 제사도 쓰이는 과실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밤나무는 제사에 쓰이는 위폐나 제사기구를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 이처럼 밤과 밤나무는 제례의식에 쓰일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여러 고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밤은 일반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먹거리였으며, 궁중에서도 다양한 조리법으로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밤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옛날부터 보호하였기 때문에 생산이 많이 되었으며, 이조시대 말기에는 밤나무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으므로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유목은 잘라버리고 나무가 노쇄하여 고사하여도 보식을 하지않게 되어 밤나무림이 아주 황폐해졌었다. 특히 서울(경성)부근의 폐해가 혹심했었다. 그 후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시대에는 철도건설 때문에 많은 벌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후에 밤재배가 다시 장려되었다.예전에 우리나라의 밤은 구황식량으로 중요한 식품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을 보면 ‘해충이 벼를 해졌으니 밤, 도토리를 채취해 흉년에 대비해야 한다'고 나와 있으며, ‘흉년 때 밤과 상수리를 주워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산과 등을 불태우는 일을 금해야 한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밤은 구황식량으로 귀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보면 ‘군사들이 마을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베어서 백성을 해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마도 백성들은 밤나무를 집 근처에 많이 심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임야 주요부산물]이라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책을 보면 잣, 은행, 표고 등의 수확예상량이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참나무류 과실의 예상 수확량도 적혀 있다. 참나무류 과실에는 밤을 포함 하는데, 이것으로 밤의 수확량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중국밤 계통의 집산지가 평양이었으므로 평양밤(약밤)이라 불렀다. 중국계통밤은 한국원산이 아닌 것은 현존지가 평양을 중심으로 50km 이내(평안남도 성천군, 강돋군, 순천군, 중화군, 강서군 등이 주산지)에 한정되었고, 중국 산동성 및 하북성에 생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가진 것으로 밝혀져,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라 믿고 있다.
강서군 지방의 것은 옛날 咸從의 해변(군면의 병합이전은 함종군, 병합후에는 강서군 풍정면 또는 장안면 부근에 해당하는 지역)에 중국의 난파선이 닿았는데 그 배안에는 밤이 있었으며 그 밤은 작지만 감미가 많아 본국의 것과 비교하여 매우 맛이 좋았으므로 귀중하게 여겨 이것을 파종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점차 부근에 전해졌으며 또한 야생동물에 의해 산간지방에 전해졌다고 한다.
成川地方에 있어서의 중국계통 밤의 수입경로는 강서지방과는 다른 것 같다. 즉 성천은 왕래가 많은 북한지역의 도시로서 중국과의 교류가 왕성했으므로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스님 또는 이 지방에서 중국으로 간 유학생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생각된다. 함종지방, 성천지방 어떤 곳이든 어느시대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평양은 고구려시대 중기이후의 수도였으며, 이 시대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왕성하였으므로 그 시대에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부근에서는 옛날 조선재래종에 대해 중국계통밤을 약밤이라고 불러 귀중하게 여겼으며 평양밤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일제시대이다. 그리고 강서군 함종면 일대에 생산되는 함종밤은 달고 내피가 얇아 박피가 쉬웠고 단밤으로 적당하여 널리 알려져 성천이외의 지방에서도 유명해져 점차 생산량이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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