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대에는 고양부리현(古良夫里縣)에 속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청정현(靑正縣)에 속해서 임성군(任城君)의 지성(地城)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청양현(靑陽縣)에 속했었다.
조선 시대 때에도 청양군에 속했으며 조선말기 1895년(고종 32년)에는 청양군 동하면(東下面)의 지성인데 처음에는 가파(佳坡)라 부른 산수가 수려한 인심좋은 곳의 상징적 마을이라 가파라 부르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갑파(甲坡)“라 써붙여 왜군이 물러가게 한 후로는 갑파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하갑리(下甲里) 만금리 대마동 원동리 고정리를 병합하여 상갑리(上甲里)라 하고 대치면(大峙面)에 편입되었다.
만정동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마을을 원동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세조때부터 인의원(仁議院)이란 원을 두고 경호간(京湖間 : 한양과 호남지방간)의 관물(官物) 운송(運送)과 행인들의 편리를 도모해 주었다 한다. 인의원이 있는 마을이라 예부터 원동이라 불렀다.
상갑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지형이 몹시 가파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가파(佳坡)라 부르던 마을인데, 가파란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좋은, 다시 말해 서 흉년에도 나무 흔하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쌀밥을 지어먹은 도방(道傍)을 지적하는 마을인데 이 마을이 그렇게 유명한 마을로 동향명지(京鄕名地)에 소문이 났었다.
그런데, 임린왜란 때 교통이 좋았던 이곳에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입구에 “갑파(甲坡)“라고 마을 표시판을 세워 놓았는데 마침 왜병들이 이곳에 와서 마을에 칩입할려고 하다가 표시판을 보고 석경으로 길이 험하고 마을이름이 갑파라 불길한 징조라고 그냥 물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을 구했는데 그후부터 이 마을이 피난처로 알려졌었다. 갑파 또는, 갑패라고도 부른다. 상갑파 윗마을은 상갑파(上甲坡)라 부르고 갑패 아랫마을은 하갑파(下甲坡)라고 부르는데 한양에서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말할 때 조선시대 때만 해도 상갑내동(上甲內洞)을 으뜸으로 꼽았는데 상갑내동이란 갑파, 상갑파, 하갑파를 통털어 지적하는 말이다.
갑파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정자(高亭子), 고정리(高亭里)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고(高)씨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래서 고씨가 정자를 지은 마을이라 고정자 혹은 고정리라 부르는 마을이다.
원동 옆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을 대마동이라 부른다. 조선 세조 때부터 한양과 호남지방 간 교통의 큰 휴식처였던 이 곳에 인의원이 있었는데, 인의원에서 큰 말우리를 만들어 놓고 말에게 먹이도 주며 쉬어가게 한 곳이다. 그래서 대마동, 대마적이라 부른다.
하갑파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만전동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상가내동 인근에 자리해 있으면서도 안전하게 농사일을 짓는 마을이라 해서 만전동이라 부른다. 조선 시대 학자 이정(李淸)이 한 때 숨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치면 상갑리 북쪽으로 산 중턱에 남향의 산신당이 있다. 산신당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에 건립되었으리라 추산되는데 제당 상록문(祭堂 上祿文)에
「崇禎紀年後丙午年」(숭정기년후병오년)
이란 기록을 보아 오래된 산신당임에는 틀림없다. 산신당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으로 정월 십오일 자시에 산제를 지내는데 산제비용은 이곳 산제계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매년 정월이 되면 생기 복덕(生氣 福德)으로 삼소인(三所任)을 봉하는데, 화주(化主) 제관(祭官) 축관(祝官)으로 나뉘어 진다. 화주는 제사(祭祀)를 담당하고 축관은 축원(祝願)을 담당하여 행사를 하는데, 제관은 7일간 목욕을 하고 3일간 기도를 올리며 동리의 무병평안과 풍년을 비는 뜻에서 마을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제사가 되는 것이다.
상갑리의 산신당에는 옛날 어느 해에 큰 소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한다. 산제 때에는 매년 꼭꼬 모우(牡牛 : 수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데 소를 잡는데는 백정을 사다가 부렸었다 한다. 그해 소를 잡는데 소를 잡는 백정이 소고기가 탐이 나서 소고기의 좋은 부위를 잘라서 소똥 속에 감춰 놓았었다. 제관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제사를 정성껏 올리는데 소를 잡았던 백정이 갑자기 쓰러지며 숨을 못쉬는 것이었다. 제사를 지내다 말고 어찌된 영문도 모르는 제관이 한참 당황하다가 백정 가까이 가서
“너 무슨 죄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묻자 죽을 지경에 이르른 백정은 손으로 소똥이 있는 곳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똥을 치워보니 거기서 큰 소고기덩어리가 나왔다 한다. 제관은 눈치 빠르게 산제를 올리며 죄를 지었지만 백정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한 즉, 그 백정이 살아났다 한다. 또한 산제당 부근에는 가끔 소나무에 송충이 피해가 많은데 아무리 소나무가 송충이에게 피해를 입어도 산제당 부근의 소나무는 (落落長松)으로 송충이 피해 하나없이 언제나 푸르다. .
상갑리 입구에 깍아 세운 듯한 바위가 양쪽으로 둘러서 있는데 이곳을 석문이라 부른다. 계곡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석문을 지나면 넓은 들인데 그 들 중앙으로 하고 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석문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이곳에 살았다는 담진 최씨의 선비 崔希?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가 자연과 산천과 새의 지저귐에 감동되어 지은 시라 전한다.
「滿全洞 淸一翁 (만전동 청일옹)
們 水 年年碧 (문 수 년년벽)
山 火 萬古紅 (산 화 만고홍)
寄 興 後來翁 (기 흥 후래옹)」
眈津後人 崔希?
조선 인조때의 일이다. 대치면 상갑리에 박상현이라는 이름난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모가 무엇인가 먹고 싶다고 하면 백리길이라도 뛰어가서 구해다가 드렸고 장날마다 장터에 나와선 손수 부모님이 좋아하는 물건을 사서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는 그였다. 허나 그나 그렇게 정성을 다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슬픔을 감출 수 없어 상객이 집에 와도 아랑곳없이 아버지 시신 앞에서 머리를 숙인채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며 우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산소를 잡기 전에 초빈(初殯)을 모시고 곁을 떠나지 않은채 조석으로 상식(上食)를 올리며 초막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비가 몹시 내려도 그는 자기의 몸은 아랑곳없이 빈소를 빙빙 돌면서
‘아버지 비가 새지 않아요 편안히 주무세요'
하고 비를 가린 곳을 어루만지면 비가 그칠 때까지 빈소를 떠나지 않는 그였다. 그럭저럭 몇일이 지났을 때나 초막에서 찌들어서 그의 얼굴은 부어 있었다. 허나 자기 얼굴이 붓는 것 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아버지 산소를 잘 써야 할텐데'
하고 주위의 산을 돌아다 보았다. 지관의 말로는 웃머리가 황토흙이라 그 흙 아래 자갈이 깔리고 자갈 아래 또 물이 흐르는 곳이라 명당 중에 명당이라 하였지만 아버지를 막상 파묻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날도 집에서 가져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수저를 움직이다가 수저를 놓고 빈소를 한번 돌아본 다음 초막에 들어와선 한쪽에 기대고 앉아서 스르르 눈을 붙였다.
그가 생각하기엔 잠을 잔다는 것도 괴로운 일로 생각하고 잠을 청하는 둥 마는 둥하고 어둠 속에 빛나는 별을 쳐다보기도 하고 눈을 감기도 하고 앉아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호랑이가 자기 앞에서 으르렁 대는 것도 알 것 없이 빈소 옆으로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꼭 끌어안고선 그는 호랑이에게 벼락같은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이봐라 산 짐승 가운데서도 가장 도량이 크다는 호랑아. 그래 어디 갈데가 없어서 돌아가신 아버지 넋을 위로하는 불효자 곁에 와서 으르렁 거리느냐? 내가 효도가 부족해서 나를 잡아먹겠다면 모르거니와 감히 내가 가장 아끼는 아버지 시신 앞에서 으르렁거리다니...... 이봐라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덤비지도 않고 입만 딱 벌리고 더욱 크게 으르렁 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봐라 나를 잡아먹고 싶으면 어서 잡아 먹어라. 시신 곁에서 조용히 하라”
이렇게 그가 소리지르자 호랑이는 그 앞에 조용히 앉더니 으르렁 거리지는 않고 입만 쩍 벌리고 자꾸 앞발로 고통스런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사람은 해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가 시신을 빈소에 내려놓고 호랑이 가까이 가서 호랑이 입속을 들여다 본 즉, 목구멍에 무엇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목구명에 손을 넣고 걸려 있는 것을 꺼내 줬더니 금방 호랑이는 기뻐서 몇바퀴고 그의 곁을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호랑이가 돌아간 다음 호랑이 목구멍에서 꺼낸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여자들이 머리에 걸치는 비녀였었다. 아마 어디서 여자를 잡아먹다가 비녀가 목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도 그는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빈소에 들려 저녁 때까지 지내다가 어두워지자 초막 속에 앉아있는데 또 호랑이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그가 다시 뛰어나가자 호랑이는 몇 번이고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머리로 등을 가르키며 꾸부리고 앉아선 등에 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등에 탔더니, 산소가 있는 부근에 가서 땅을 파며 자꾸 뱅뱅 돌더니 한참 돌다가 그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또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효자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호랑이가 지적한 자리에 아버지의 산소를 썼다 한다. 그것이 좋은 징조였던지 호랑이가 가르쳐준 장소에 아버지를 묻고 난 후 박효자의 집안은 자손까지 날로 번창하고 그 후엔 문중에서 대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속출하여 집안이 번성했다고 한다.